얼리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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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얼리강 문화는 기원전 1600년경 중국 황허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청동기 문명이다. 정저우를 중심으로 7km에 달하는 성벽 도시가 있었으며, 뼈 공방, 도자기 공방, 청동기 공방 등 대규모 작업장이 운영되었다. 판룽청 유적에서는 다수의 청동 기물이 발견되었으며, 퉁루산에서 구리가 기원했음이 밝혀졌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얼리강 문화를 상나라의 초기 단계로 보지만, 갑골문자 미출토로 인해 유럽 고고학자들은 상나라와의 연관성에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얼리터우 문화의 영향을 받아 청동기 사용이 확대되었으며, 이후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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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리강 문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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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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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얼리강 문화 |
로마자 표기 | Eolligang Munhwa |
중국어 표기 | 二里崗文化 |
중국어 병음 | Èrlǐgǎng Wénhuà |
위치 | 화북평원 |
시대 | 중국 청동기 시대 |
연대 | 기원전 1600년 ~ 기원전 1400년경 |
대표 유적지 | 얼리강 |
주요 유적지 | 정저우 상성 옌스 판룽청 |
이전 문화 | 얼리터우 문화, 웨스 문화 |
이후 문화 | 샤오솽차오–환베이 |
2. 주요 유적
얼리강 유적은 둘레 약 7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곽 도시였으며, 성벽 밖에는 골기나 도기를 만드는 큰 공방군이 있었고, 그 안에는 두 개의 청동기 공방도 포함되어 있었다. 얼리강 유적 대부분은 현대 정주시 시가지 아래에 있어 발굴이 어렵기 때문에, 얼리강 문화에 대한 연구는 얼리강 유적 이외의 장소에서의 발굴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얼리강 문화는 황허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중국 최초로 청동기를 대대적으로 사용한 문화였다. 초기에는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창장 강 유역까지 도달했으며, 후베이성 황피 현(현재의 우한시 황피 구)의 판룽청 유적에서는 많은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얼리강이 있는 정주 부근은 구리 출토가 적어, 판룽청은 구리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초 기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를 절정으로, 이후 얼리강 문화는 서서히 쇠퇴해 갔다.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얼리강에서 상나라의 특징을 나타내는 갑골문자가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나라와 연결하는 것에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1]
2. 1. 정저우 상성
1951년 정주시에서 얼리강 유적이 발견되었다.[1] 얼리강 유적은 둘레 약 7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성으로, 성벽 바깥에는 골기 및 도기를 만드는 큰 공방군이 있었다.[1] 공방 안에는 두 개의 청동기 공방도 포함되어 있었다.[1] 성벽은 중국 신석기 시대의 룽산 문화에서 비롯된 다짐흙 건축 기법을 사용했다. 벽은 밑면이 20m 너비에 이르며 높이는 8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 도시는 얼리강 도시 유적 위에 자리 잡고 있어 고고학적 발굴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얼리강 문화에 대한 정보는 주로 다른 얼리강 유적을 연구하여 얻는다.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정주 부근을 상나라(은) 왕조의 초기 중심지로 보고 있으며(은나라 후기의 갑골문 점복에 기록된 건국자 탕의 박), 얼리강 문화를 상 왕조의 초기 단계로 파악하고 있다.[1]
2. 2. 판룽청 유적
후베이성 장강 유역에 위치한 판룽청 유적은 현재 얼리강 문화와 관련된 가장 큰 발굴 유적이다. 1954년에 발견되었으며, 1974년과 1976년에 발굴되었다.[1]정저우는 청동의 구성 금속에 대한 현지 접근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판룽청과 같은 유적지는 아마도 멀리 떨어진 금속 자원을 확보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판룽청에서는 다수의 청동 기물이 발견되었다. 후베이성 다즈의 퉁루산과 장시성 루이창의 퉁링 광산 및 야금 유적에서 발굴된 목재 표본의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해 판룽청 유적지에서 발굴된 청동 기물과 퉁루산을 비교하였다. 판룽청 청동의 광물 성분은 퉁루산의 광물 성분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는 판룽청의 구리가 퉁루산에서 기원했음을 나타낸다.[1]
얼리강 문화는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문화이다. 얼리강 문화는 청동기를 대대적으로 사용하는 중국 최초의 문화이며, 그 초기에는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창장 강 유역에까지 도달했다. 후베이성 황피현(현재의 우한시 황피 구)의 판룽청 유적(장강 유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유일한 상대의 도시 유적)에서는 많은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얼리강이 있는 정저우 부근은 구리 출토가 적어, 판룽청은 구리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초 기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절정으로 하여, 이후 얼리강 문화는 서서히 쇠퇴해 갔다.
3. 청동기
얼리강 문화는 청동기를 대대적으로 사용한 중국 최초의 문화이다. 얼리강의 청동기는 이전 얼리터우 문화의 양식과 기술을 발전시킨 것으로, 중국에서 청동기 주조를 광범위하게 사용한 최초의 고고학적 문화였다. 청동 용기는 얼리터우 시대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양식도 통일되었다.
얼리강 문화 초기에는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여 창장 강 유역에까지 이르렀고, 후베이성 황피현(현재의 우한시 황피 구)의 판룽청 유적에서는 많은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정저우 부근은 구리 출토가 적어, 판룽청은 구리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초 기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절정으로 하여, 이후 얼리강 문화는 서서히 쇠퇴해 갔다.
4. 상나라와의 관계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정저우 부근이 상나라(은나라)의 초기 수도이고, 기원전 1600년은 탕왕이 상나라를 개국한 년대이므로 얼리강 문화를 상 왕조의 초기 단계로 파악하고 있다.[1] 한편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얼리강에서 상 왕조의 특징을 나타내는 갑골문자가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 얼리강을 상나라와 연결하는 것에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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